동래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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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동래성 전투는 1592년 임진왜란 발발 직후 일본군이 부산진 전투에 이어 동래성을 공격하여 벌어진 전투이다. 조선은 일본의 침략 징후를 인지했음에도 제대로 대비하지 못했고, 동래성 부사 송상현은 고니시 유키나가가 항복을 요구하자 이를 거부하고 결사항전 의지를 보였다. 전투에서 조선군은 열악한 장비와 훈련 부족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에 맞서 싸웠으나, 결국 성이 함락되었고 송상현을 비롯한 많은 장수와 백성들이 사망했다. 동래성 함락으로 일본군은 한성으로 진격하는 교두보를 확보했고, 송상현의 항전은 이후 한국에서 숭고한 정신으로 기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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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래성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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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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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정보 | |
분쟁 | 임진왜란 |
날짜 | 1592년 5월 25일 (그레고리력), 1592년 4월 15일 (음력) |
장소 | 동래읍성 |
좌표 | N] [[129.0838 |
지도 유형 | 대한민국 |
결과 | 일본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도요토미 정권 |
교전국 2 | 조선 |
지휘관 및 지도자 | |
일본군 지휘관 | 고니시 유키나가 소 요시토시 |
조선군 지휘관 | 송상현 조영규 이각 박홍 이언성 홍윤관 |
병력 규모 | |
일본군 병력 | 18,000명 |
조선군 병력 | 2,500–3,000명 (총 20,000명, 민간인 및 민병대 포함) |
피해 규모 | |
일본군 사상자 | 100명 사망 400명 부상 |
조선군 사상자 | 3,000명 사망, 500명 포로 (조선 기록) 5,000명 사망 (일본 기록) |
2. 배경
부산진 전투에서 부산과 주변의 보루를 함락시킨 후, 일본군은 연안부의 교두보를 확보할 필요가 있었다. 부산 북쪽 수 km 지점에 있는 동래성은 산의 지형을 이용한 산성이었고, 북쪽의 한성으로 통하는 주요 도로를 장악하는 요지였기 때문에 일본군은 먼저 이곳으로 향했다.
송상현 동래부사는 일본이 쳐들어올 것을 대비하여 동래성 주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외부에서 성을 관측하기 어렵게 만들었다.[3] 경상좌도병마절도사 이각은 일본군 상륙 소식을 듣고 군대를 이끌고 합류했으나, 일본군의 기세에 눌려 성 밖에서 싸우겠다며 밀양 방면으로 도주하였다. 양산군수 조영규는 어머니에게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 돌아와 전투에 합류했다.[3]
동래부사 송상현은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여 동래성 주변에 나무를 심어 외부에서 동래성을 관측하기 어렵게 만드는 등 만반의 준비를 했다.
경상좌도병마절도사 이각은 일본군 상륙 소식을 듣고 군대를 이끌고 합류하였으나, 일본군의 기세에 눌려 성 밖에서 싸우겠다고 하였다. 송상현은 이각을 붙잡고 성안에서 함께 싸우길 바랐으나, 이각은 밀양 방면으로 도주하였다. 양산군수 조영규 또한 전투에서 사망할 것을 직감하고 어머니에게 마지막 인사를 한다며 양산으로 돌아갔다. 결국 송상현은 울산군수 이언성 등과 함께 전투를 치르게 되었다.
3. 전투 준비
고니시 유키나가는 부산진을 함락시킨 후, 동래성으로 진격했다. 일본군은 부대를 셋으로 나누어 황령산 기슭, 동래성 서편, 취병장으로부터 남문 방향으로 동래성을 포위했다.[1] 고니시는 "싸우겠다면 싸울 것이로되,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달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라는 팻말을 세웠고, 송상현은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라고 회답하였다.[3]
3. 1. 조선
송상현은 동래성 주변에 나무를 심어 외부 관측을 어렵게 하는 등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3] 경상좌병사 이각은 일본군의 기세에 눌려 성 밖에서 싸우겠다며 도주했고, 양산군수 조영규는 어머니에게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 돌아와 전투에 합류했다. 울산군수 이언성 등과 함께 전투를 준비하던 송상현은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라는 답으로 일본군의 요구를 거절했다. 동래성 백성들까지 수비에 가담하여 일본군에 저항할 준비를 하였다.
3. 2. 일본
고니시 유키나가는 부산진을 함락시킨 후, 동래성으로 진격했다. 일본군은 부대를 셋으로 나누어 동래성을 포위했다. 일대는 황령산 기슭에, 다른 일대는 동래성 서편의 대로에, 마지막 일대는 취병장으로부터 남문을 향하도록 하여 동래성을 완전히 에워쌌다.[1]
고니시는 전투에 앞서 조선에 항복을 권유하며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달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는 내용의 팻말을 세웠다.
4. 전투 과정
송상현은 일본이 쳐들어올 것을 대비하여 동래성 주변에 나무를 많이 심어 외부에서 동래성을 관측하기 어렵게 했다.[3]
일본군 상륙 소식을 들은 경상좌도병마절도사 이각은 군대를 이끌고 합류하려 했으나, 일본군의 기세에 눌려 성 밖에서 싸우겠다며 나갔다. 송상현은 이각을 붙잡고 성안에서 함께 싸우길 바랐으나, 이각은 밀양 방면으로 도주했다. 양산군수 조영규 또한 어머니에게 마지막 인사를 한다며 양산으로 돌아갔다. 송상현은 울산군수 이언성 등과 함께 전투를 치렀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새벽에 부산진성을 출발하여 오전 10시 동래성에 도착해 부대를 3개로 나누어 성을 포위하였다.
고니시는 '''"싸우겠다면 싸울 것이로되,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달라"'''(戰則戰矣 不戰則假道)라는 패목을 세워 조선군과 협상을 시도했고, 송상현은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라고 답했다.[1] 동래성 백성들까지 수비에 가담하여 저항했지만, 일본군은 성곽이 낮고 수비가 허술한 동문의 인생문(人生門)을 집중 공격하여 방어선을 뚫었다. 양산에서 돌아온 조영규는 동문이 무너지자 일본군에 돌진하여 싸우다 전사했다.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송상현은 조복으로 갈아입고 고향의 부모에게 보내는 시를 쓴 뒤 일본군의 칼에 맞아 전사했다.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전투는 4시간, 한국 측 기록에 따르면 12시간 동안 지속되었다. 일본군의 아르케부스 화력에 수비대가 궤멸되었고, 일본 선봉대 100명이 사다리를 타고 성벽을 넘어 백병전으로 요새를 점령했다. 송상현은 사로잡혔지만 항복을 거부하여 참살당했다. 일본 측 자료에 따르면 일본군은 전사 100명, 부상 400명, 한국군은 5,000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한국 측 자료에 따르면 최소 3,000명이 사망했고 500명이 포로로 잡혔다.
5. 결과 및 영향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 부대는 부산진성과 동래성을 함락한 후, 가토 기요마사, 구로다 나가마사 등과 함께 경상도와 충청도를 거쳐 충주까지 진격했다. 이들은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이 이끄는 조선군을 궤멸시켰다.[3]
소 요시토시는 송상현과의 친분 때문에 그를 생포하려 했으나, 전사 소식을 듣고 그의 시신을 수습하여 성 뒤편 언덕에 장례를 치러주었다.
경상도 우수사 원균은 부산과 동래 함락 소식에 공황 상태에 빠져 함대를 한산도로 철수시키려다 어선을 일본 함대로 오인하는 등 혼란을 겪었다. 그는 무기와 물자를 파괴하고 함대를 자침하려 했으나 부하들의 만류로 저지되었고, 당시 그의 함선은 4척만 남았다.
동래성 함락으로 일본군은 한성으로 가는 주요 경로를 확보했고, 부산항은 10만 명 이상의 일본군과 장비, 물자가 상륙하는 안전한 거점이 되었다.
한편, 동래성 함락 소식을 들은 경상좌병사 이각은 적전 도주 죄로 조선 조정에 의해 처형되었다.
6. 일화
소 요시토시는 송상현의 용맹함에 감탄하여 그의 무덤에 "충신"이라는 비석을 세웠다.[3] 송상현의 저항은 한국에서 전설이 되었으며, 동래성 충렬사에는 정발, 윤흥신과 함께 송상현의 그림이 모셔져 있다.
송상현의 부인은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으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동정하여 조선으로 돌려보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7. 평가
임진왜란 초기 송상현과 동래성 군민들의 항전은 조선군의 사기를 높였다. 일본군 지휘관 소 요시토시는 송상현의 용맹함에 감명받아 그의 시신을 매장하고 무덤에 "충신" 비석을 세웠다.[3] 송상현의 충절은 후대에 귀감이 되었고, 그의 저항은 한국에서 전설이 되었다. 동래성 충렬사에는 정발, 윤흥신과 함께 송상현을 기리는 그림이 있다.
7. 1. 긍정적 평가
임진왜란 초기, 송상현과 동래성 군민들의 용감한 항전은 조선군의 사기를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일본군 지휘관 소 요시토시는 송상현의 용맹함에 깊은 감명을 받아 그의 시신을 정중히 매장하고 무덤 위에 "충신"이라는 비석을 세웠다.[3] 송상현의 충절은 후대에 귀감이 되어 조선 백성들의 항전 의지를 고취했으며, 그의 침착한 저항은 한국에서 전설이 되었다. 동래성 언덕 기슭에 있는 충렬사 사당에는 정발, 윤흥신과 함께 송상현을 기리는 그림이 있다.참조
[1]
웹사이트
동래전투(東萊戰鬪) The battle of Dongnae
https://encykorea.ak[...]
2023-08-25
[2]
서적
完訳フロイス日本史5 豊臣秀吉篇Ⅱ
[3]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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